[차이나어텐션]‘대만’의 올림픽 참가 명칭

강병환 논설위원장 승인 2021.07.27 14:56 | 최종 수정 2021.07.27 18:26 의견 0
도쿄만에 있는 올림픽 오륜 조형물 (사진=신화통신)


1971년 3월, 일본 나고야에서 제31회 세계탁구대회가 열렸다. 일본탁구협회는 중공 선수의 참가를 요청했다. 베이징은 적대 진영에서 개최되는 국제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미국 탁구팀은 베이징, 상하이에서 중공 팀과의 친선 경기를 펼친다.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는 미국 선수들을 접견했다. 이른바 핑퐁외교의 시작이다. 작은 공이 큰 공(지구)을 움직였다. 이어서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 키신저(Henry Kissinger)가 베이징을 비밀 방문했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는 2758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이 당시 유엔에서 의석을 가지고 있던 중화민국 자리를 대체한다는 결의안이다. 이로써 유엔에서 장제스로 대표되던 중화민국은 축출당했다. 국가를 회원 자격으로 하는 유엔에서의 퇴출은 베이징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1973년 대만은 ‘하나의 중국’ 대표권 문제로 인해 아시아 게임에서도 쫓겨났다. 1975년 중공은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대만을 배제하는 승인을 신청했다. 하지만 IOC가 정치적 불간섭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이유로 들었기 때문에, 대만은 퇴출당하지는 않았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참가한 대만은 ‘중화민국, Republic of China’ 명의로 참가를 거부당하자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당시 캐다다는 이미 중국과 수교를 맺고 있었다. 베이징도 마찬가지다. 1979년 이전까지, 올림픽에서 타이베이가 나오지 않으면 베이징은 들어가지 않는다(台北不出, 北京不入)는 원칙을 견지했다. 중공은 ‘두 개의 중국’으로 비칠 수 있는 IOC의 회원 명칭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회도 불참했다. 1958년에는 아예 IOC를 탈퇴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1979년까지 올림픽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화민국이라는 명칭은 항상 쟁의를 안고 있었다.

1979년 10월 나고야에서 올림픽 집행위원회의 결의가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중화민국의 명칭, 국기, 국가의 사용을 일방적으로 금지했다. 대만은 즉시 스위스 로잔 법원에 제소했다. 즉 나고야 결의안은 올림픽 헌장을 위배했으며, 정치적 편견과 부당한 간여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국제 체육계에서 소송전이 전개되었다.

1980년 로잔 법원은 나고야 결의가 올림픽 헌장과 정신을 위배했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하여 올림픽 헌장과 조문을 다시 수정하고 세칙을 마련했다. 첫째, 헌장 제8조의 국가 범위의 규정에 토지 및 영토의 일부분(Part of territory) 이 보강되었다. 둘째, 24조 제2항을 증설했다. 국가올림픽위원회가 사용하는 깃발과 표지는 반드시 국제올림픽 집행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셋째, 원래 64조, 65조, 66조의 규정에 세칙을 마련했다. 원래 내용은 즉 각국이 개막식, 폐막식에 사용하는 국기, 국가, 국명은 대표단의 기와 노래로 바꾸었다. 국가(National)를 대표단(Delegation)으로 바꾼 것이다.

1980년 6월 동계올림픽위원회는 대만선수단의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를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대만은 또다시 곤경에 처했다. 1980년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가 IOC 제7대 위원장으로 당선되면서, 대만의 쉬헝(徐亨, 中華民國奧會, Republic of China Olympic Committee) 위원장과 회적(會籍) 명칭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1981년 3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쌍방은 명칭 협상 문건에 서명했다. IOC와 중화타이베이올림픽 위원회 간의 협의서(國際奧會與中華台北奧會協議書, An Agreement between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and Chinese Taipei Olympic Committee)다. 이른바 대만이 올림픽에 참가할 때의 명칭에 대한 합의다. 로잔 협의에 의하면 대만의 올림픽 참가 명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台北)다. 중화는 중화민국의 국호를 참고한 것이고, 타이베이는 대만의 행정 수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중화 타이베이는 행정중심이 타이베이에 있는 중화민국이라는 함의가 있다. 양장(장제스, 장징궈)의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은 중화민국, 적은 중공이다. 즉 중공과는 같이 설 수 없다) 정책과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킨다는 고집은 결국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는 명칭까지 오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IOC의 기본원칙과 입장으로 볼 때, 특히 모리스(Michael Morris, 1972-80) IOC 위원장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로마, 동경, 멕시코 올림픽에서 사용한 ‘Taiwan, 대만’ 명칭은 현재까지 사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쿄만에 있는 올림픽 오륜 조형물 (사진=신화통신)


현재 대만은 ‘대만(Taiwa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실정이다. 국호 개명, 헌법 제정은 베이징에 대만독립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2018년 대만의 육상 영웅 지정(紀政)의 주도로 2020년 동경올림픽에 ‘대만’ 명의로 참가하기 위한 국민투표 운동을 벌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베이징은 이에 반발하여, 2019년 대만 타이중(臺中)에서 열리게 될 제1회 동아시아 청소년 대회 개최 자격을 박탈하는 조처를 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자국이 왜소하게 불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만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의 한자권 국가들은 Chinese Taipei를 중국 타이베이(中國台北 )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 양안 간 명칭을 둘러싸고 진행된 복잡한 내막을 몰라서 그럴 것이다. 영문은 동일할지라도 중화 타이베이와 중국 타이베이는 단 한자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베이징의 해석은 이렇다. 중국 타이베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개의 성이며 지방정부인, 중국의 타이베이라는 의미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중국 탁구 선수단 (사진=신화통신)


1981년 로잔 협의 후, 대만 체육계는 침울에 빠졌다. 대만의 언론매체도 올림픽 행사를 최대한 낮은 수위로 처리했다. 그런데도 베이징은 대만의 명칭 문제를 심하게 통제했다. 이후에도 국제 경기, 국제 회의 참가시 대만에 대한 명칭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대만 측이 잠시라도 소홀하면 즉시 중국에서 항의가 들어왔고, 심지어는 불유쾌한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결국 양안 간에도 대만 명칭에 대한 합의를 체결했다. 1989년 4월 6일 홍콩에서 대만의 중화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 겸 부주석 리칭화(李慶華)와 중국대륙의 올림픽 위원회 주석 허쩐량(何振梁) 사이에 대만 명칭에 관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중국에서 개최되는 경기, 회의, 활동에 참여하는 대만지구의 체육 단체나 조직은 IOC의 규정에 따른다. 주최 측에서 출판하는 문건, 소책자, 편지, 명패, 방송 등 대만지구 체육단체 혹은 체육조직의 명칭은 모두 중화 타이베이(中華台北)로 칭한다.” 하지만 중국의 신문이나 방송은 대만을 중국 타이베이(中國臺北)로 부른다. 이에 대해 항의를 하면, 신문 보도의 자유라고 둘러댄다. 다시 말해, 베이징은 대만을 홍콩·마카오와 같은 특별 행정구로 취급하고 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 (사진=대만 정부 홈페이지)


대만은 경기장 밖에서도 자국의 국기를 휴대하거나, 흔들 수도 없다. 심지어 대만이 주최하는 국제대회의 개폐회식에서도 국기와 명칭에 대한 분쟁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대만이 국가로 비칠 수 있는 명칭에 대해서 베이징은 극도로 민감한 신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2020 동경올림픽에서 ‘대만’의 명칭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공영 방송인 NHK, 뉴욕 타임스도 중화 타이베이(中華臺北)를 대만으로 고쳐 불렀다. 한국 매체도 대만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만 선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도, 여전히 올림픽기가 청천백일기를 대체해서 게양되고, 국가(國歌) 대신 올림픽 찬가가 울려 퍼진다. 지금 대만인들은 올림픽 메달보다 ‘대만’으로 불러 주는데 더 감격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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